4. 판단중지
사태 그 자체로 돌아가라! 현상학적 환원작업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은 바로 판단중지(Epoche)이다. 습관적인 이
해나 선입견들에 대해서 판단을 중지하고 사태 그 자체로, 체
험 그 자체로 돌아가는 것이 현상학의 모토인데, 막상 이것을
실행하려고 할 때 어려움에 봉착한다. 이런 어려움과 관련된
논의는 2가지 정도가 있다.
첫 번째는 어려움은 우리의 습관적인 앎의 작용이 무의식에
서 일어난다는 것이다. 의식은 순수한 의식이 아니라, 기존의
지식과 관습에 의해서 이미 물들어져 있다는 것이다. 물론 이
때의 판단중지는 모든 실재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고, 그것에
대한 무비판적이고 자연적인 태도를 잠정적으로 괄호 치자는
것이다. 이렇게 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와 더불
어서 새로운 통찰의 기반을 확보하는 장점이 있다. 하지만 현
상학의 이런 태도는 장애가 되는 선입견이나 습관적인 반응에
관심이 없다. 선입견이나 습관적인 반응, 또한 우리 삶의 일부
이고 우리가 체험하는 과정의 하나이다. 이런 장애에 대한 이
해가 없이는 효과적으로 판단중지라는 과업을 이룰 수가 없
다. 때문에 이런 부분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와 훈련이 필요하다. 이런 현상학 내부에서는 순수의식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
있지만,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하고 장애요인에 대한
통찰을 어떻게 훈련해야 할지 하는 부분은 여전히 과제로 남
아있다고 본다.
유식학은 통찰을 방해하는 심리현상을 연구하는데 매우 정
교한 체계를 만들어왔다. 깨어있지 못한 습관적인 반응은 무
반성적인 자연적인 태도로서, 유식학에 따르면 제8식 아뢰야
식(ālaya-vijñāna)의 종자가 그 주범이다. 종자란 어떤 공능
을 불러일으키는 잠재적인 힘인데, 언어적인 분별, 자아개념,
선악의 행위등과 같은 것들40)이다. 이런 아뢰야식의 종자를
방치하고서는 판단중지의 명상수행이나, 현상학적 작업은 사
실상 난관에 봉착한다. 종자에 의해서 물들어진 의식을 정화
하는 것을 유식학에서는 전의(轉依), 혹은 의식이 바뀌어서
지혜가 된다는 전식득지(轉識得智)란 용어를 사용한다. 이것
은 마음을 덮는 오염이 제거되면서 본래적인 청정한 마음이
밝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.41) 물든 의식을 정화시키는 명상
이 바로 영상관법이다. 습관적인 반응을 유지시키는 종자들의
영상을 반복적으로 떠올려서 관찰함으로써 의식을 정화하는
작업이 전식득지의 과정이다. 이것은 유가사지론『瑜伽師地
論』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3단계로 진행된다.
- 마음속에 알아야할 사물의 영상 떠올리기[影像作意]
-거친 번뇌를 소멸하기[便得轉依]
-사물의 영상을 초월한 지견의 발생[無分別智見]
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유식 3성설(변계소집성, 의타기성,
원성실성)의 과정이고 영상관법의 대표적인 ‘작업모형’이 된
다. 영상관법에 의해서 물들어진 의식[종자]이 점차로 청정한
본래의 모습을 회복한다는 점에서 영상관법은 전식득지를 획
득하는 중요한 기술적인 길잡이가 된다. 특히 두 번째의 거친
번뇌를 소멸시킨다는 점에서 유식수행과 영상관법이 심리치
료적 의미를 가진다. 세 번째의 과정은 무분별의 지견을 통찰
하는 것이다. 앞에서 살펴본 현상학적 연구에서 사용하는 아
래의 3단계절차와 비교하면 영상관법과 현상학적 작업의 차
이점이 분명해진다.
- 다양한 경험 자료를 수집하여 살펴보기
-공통된 요소를 몇 개의 범주로 묶기
-차이점을 제거하고 본질을 직관하기
질적 현상학적 분석은 자료를 수집하여, 공통된 요소를 범주화하고, 그런 다음에 차이점을 제거한 그것의 본질을 직관
하는 것이 목표이다. 이점은 어떤 경험에서 그 본질적인 의미
를 찾는 작업이다. 반면에 영상관법은 자료수집이 특정한 한
개인적 작업에서 이루어지고 목표는 번뇌의 소멸과 초월적인
통찰이다. 그 결과는 질적 현상학적 작업이 삶에 이해와 더불
어서 어떤 지식의 체계를 이룬다면, 영상관법은 집착 없는 깨
어있음[無分別]과 함께 직접적인 지견(智見)을 얻는 것이다.
한쪽은 객관적인 지식으로서 본질, 의미 있는 해석을 ‘구축하
는’ 작업이고, 다른 한쪽은 일상의 삶에서 구성된 보편화된 지
식을 오히려 ‘내려놓는’ 작업이다. 한쪽은 불안을 어떻게 경험
하며, 불안을 불안으로 만드는 공통된 요소가 무엇인지를 이
해하고 해석한다. 반면에 다른 한쪽은 해석하는 대신에 불안
을 충분하게 경험하고 그것의 속성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
발견하여 불안 그 자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중요하다.
우리에게 이들 모두가 다 필요한 과정이다. 물이 가득한 컵은
한번은 비워져야 하고, 비워진 컵이어야 다시 채울 수가 있다.